정조 대왕 때 1782년에서 1783년 사이에 영남 안찰사 김아무개가 가을에 순시를 하다가 함양에 도착해 위성관에 머물렀다.
[청구야담][21st]모인(餉山果渭城逢毛仙)
안찰사는 심부름꾼들과 기생들을 모두 물러가게 하고, 방에서 혼자 잠을 잤다.
한밤 중 인적이 고요한데, 침실의 문이 슬쩍 열렸다가 닫히더니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김공이 잠에서 깨어나 물었다.
[너는 누구냐? 사람이냐, 귀신이냐?]
[저는 귀신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깊은 밤에 다른 사람 하나 없는데 어찌 이렇게 수상하게 움직이는가? 혹시 나에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인가?]
[간절히 아뢸 일이 있나이다.]
김공이 일어나서 사람을 불러 불을 켜려고 하자 그 사람이 말했다.
[그러지 마십시오. 만약 제 모습을 보신다면 안찰사께서 틀림없이 놀라고 두려워하실 것입니다. 어두운 밤이라도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데는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김공이 말했다.
[그대는 얼마나 괴상한 모습을 하고 있기에 불도 켜지 못하게 하는가?]
[제 온 몸이 털투성이이기 때문입니다.]
가면 갈 수록 그 사람의 말이 괴이하였기에 김공이 다시 물었다.
[그대가 과연 사람인가? 도대체 어떤 이유로 온 몸에 털이 나게 되었단 말인가?]
[저는 원래 상주에 살던 우씨 성의 주서입니다. 중종 때 명경과에 급제하여 한양에서 벼슬을 얻은 뒤, 정암 조광조 선생의 제자가 되어 여러해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스승께서 기묘사화 때 목숨을 잃으시고 여러 유생들이 잡혀갔지요. 저는 한양에서 도망쳤는데 만약 고향집으로 간다면 바로 잡혀들어갈 것 같아 지리산으로 갔습니다. 여러 날을 굶주리고 피곤한데다 난생 처음 골짜기에 들어갔기에 먹는 것마저 힘들었습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물가변에 혹시 풀이라도 있으면 뽑아 먹었고, 산과일이 있으면 따 먹었습니다. 먹을 때는 배가 좀 부르는 것 같더니, 똥을 눌 때면 모두 설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렇게 6개월 정도를 지냈더니 점차 온 몸에 털이 나기 시작하더니 그 길이가 몇 마디가 될 정도였습니다. 걸음걸이도 빨라져 마치 나는 것 같아, 천길 절벽도 뛰어넘을 수 있어 무슨 원숭이 같이 되었지요. 나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 띄면 괴물로 몰려 죽을 것 같아 산에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가끔 목동을 보더라도 몸을 숨겼지요.]
그 사람은 목이 메인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깊은 계곡, 겹겹이 쌓인 바위 사이에서 오랜 세월을 살며 혹시 달이 밝게 뜨면, 혼자서 지난날 배웠던 경서를 암송하곤 했습니다. 제 신세를 생각하니 너무나도 한심하여 혼자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고향의 부모와 처자가 모두 세상을 떠났을 것을 알기에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살다보니 사나운 호랑이나 독사도 무섭지 않고, 단지 사냥꾼이 무서워 낮에는 숨어다니고 밤에만 나다녔습니다. 이렇게 괴물의 꼴이 되어버렸지만 마음 속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계속 말했다.
[언제나 세상 사람을 한 번 만나, 세상일을 듣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괴상한 모습으로는 차마 사람들 앞에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마침 어르신의 행차가 이 곳에 오신다는 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와서 뵙는 것일 뿐입니다. 저에게 다만 조광조 선생의 자손이 몇이나 되는지, 선생이 돌아가신 뒤 그 명예가 회복되고 결백함이 밝혀졌는지만 알려 주십시오. 이렇게 부탁합니다.]
김공이 말했다.
[정암 선생은 인조 때 명예가 회복되어 종묘에 그 신위가 배향되기까지 하셨습니다. 사액서원도 여러 곳에 있고 그 댁 자손들은 여러 사람들이 있는데, 조정에서도 높은 자리에 올라갔으니 걱정 마십시오.]
김공은 내친김에 기묘사화 당시의 일에 관해 물었다.
그 사람은 하나라도 빠트리거나 잊어버린 것 없이 모든 사실을 낱낱이 말해 주었다.
또 처음 도망칠 때 그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 물었더니 그가 말했다.
[서른 다섯이었습니다.]
[그럼 기묘년으로부터 지금까지 300여년이 흘렀는데, 그렇다면 그대의 나이는 거의 400살에 가깝겠구려!]
[저는 그 동안 깊은 산에서 세월을 보내서 나이를 잘 모르겠습니다.]
김공이 물었다.
[그대는 지리산에 산다고 하셨지요. 그대가 사는 굴과 이 곳의 거리는 상당히 멀텐데 어찌 그렇게 빠르게 오신 것이오?]
[기운이 날 때는 아무리 험한 절벽이라도 원숭이가 뛰어 놀듯 넘어다닙니다. 한순간에 몇십 리를 달릴 수 있지요.]
김공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 매우 놀라며 음식을 대접하려 하자 그가 말했다.
[음식은 필요 없습니다. 굳이 주시려거든 과일이나 좀 주시지요.]
하지만 하필 방 안에 과일이 없었다.
밤중에 과일을 구해오라고 하기도 힘들었기에 김공이 말했다.
[지금 하필이면 과일이 없구려! 내일 밤 그대가 다시 온다면 그 때 과일을 준비해 놓겠소. 내일 오실 수 있겠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는 즉시 방을 나가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김공은 그가 다시 온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병이 났다고 핑계를 대고 하루 더 위성관에서 머물렀다.
그 날 아침과 점심 식사에 나온 과일을 모두 챙겨놓고 그 사람을 기다렸다.
과연 밤이 깊어지자 그가 다시 왔다.
김공이 일어나 그를 맞이하고, 과일을 내어주니 그가 크게 기뻐하며 과일을 모두 다 먹었다.
[덕분에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김공이 물었다.
[지리산 안에 과일이 많다고 들었는데, 그대는 먹을 걱정은 없는 것이오?]
[매년 가을 낙엽이 질 때면 밤중에 주워 모아둔 과일이 서너 무더기는 되는데, 그것으로 먹고 삽니다. 처음 풀만 먹을 때의 괴로움은 이제 극복했습니다. 과일만 먹어도 기력이 펄펄 넘칩니다. 사나운 호랑이가 바로 앞에 있더라도 손발로 때려 잡을 수 있습니다.]
김공과 그 사람은 기묘년 사건에 대해 한바탕 이야기를 더 하고 헤어졌다.
김공이 평생 한 번도 다른 이에게 이 이야기를 하지 않다가, 죽기 전에야 비로소 자기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듣기로 옛날에 털이 난 여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명하여 이 일을 글로 써서 알리게 하였다.
지금 세상에 모인의 이야기가 퍼진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다.
[청구야담][20th]산신이 지키려고 한 길지(假封塋山神護吉地)
옛날 전의 이씨의 선조가 부모의 상을 당해 시체를 안치할 장소를 찾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선산 옆에 있는 한 산이 밝고 모습이 수려하였으니 그 곳에 안장하기로 했다.
그런데 풍수가가 말했다.
[이 땅이 매우 좋은 길지이나, 아직까지 무덤이 없는 것은 그 땅을 팔 때마다 번개가 치고 비가 내리는 흉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씨는 그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것이라 생각해 무시하고 시체를 그 곳에 묻기로 했다.
그런데 상여가 그 곳에 도착해 보니 시체를 묻으려고 한 곳에 이미 무덤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것을 본 손님들이 말했다.
[어떤 나쁜 놈이 하룻밤 사이에 장지를 훔쳐 장사를 치뤘나봅니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이씨는 한참 동안 속으로 깊게 생각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것은 분명 사람의 술수가 아닐 것이오. 한 번 무덤을 파봅시다.]
주위의 모든 사람이 천륜을 거스르는 행위라고 이씨를 말렸지만, 이씨는 고집을 피우며 말을 듣지 않았다.
무덤을 헐어보니 관이 하나 있었는데, 옻을 칠한 것이 마치 거울처럼 빛났다.
관 위에 놓인 깃발에는 [학생 고령 신공의 관] 이라고 붉은 글씨로 써 있었다.
이씨가 말했다.
[과연 내가 짐작한 대로구나!]
이씨는 관을 들어 무덤 밖으로 꺼내고 그것을 도끼로 부쉈다.
안에는 사기 그릇 조각만 가득 차 있었는데, 햇빛을 받자마자 가루가 되어 순식간에 모두 사라졌다.
사람들이 축하하면서도 이상하게 여겨 질문을 하니, 이씨가 말했다.
[내가 옛날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있소. 산신이 땅을 너무 아끼면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일부러 이런 장난을 친다고 하더군요. 내가 어찌 그런 속임수에 넘어가겠습니까?]
말을 마치고 이씨는 아무런 근심 없이 장사를 지냈다.
지금도 전의 이씨 가문은 대대로 벼슬길에 올라 집안이 매우 융성하다.
[청구야담][19th]김역관과 천하일색(報重恩雲南致美娥)
제독 이여송은 평양에서 왜구를 정벌했다.
그 때 이여송은 김씨 성을 가진 역관을 총애하였다.
김역관은 나이가 겨우 20세로, 꽃다운 용모에 미색이 흘러 넘쳤다.
이여송은 밤낮으로 그를 가까이 하며 잠시도 놓아주지 않으니, 임금이 왕비를 사랑하는 것도 그것만 못할 정도였다.
김역관이 무슨 말을 하던 반드시 들어주었으니, 그의 소원대로 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여송은 군대를 철수하여 명으로 돌아갈 때도 김역관을 데리고 갔다.
만주 봉황성 책문에 이르렀는데, 군량이 약속된 기일이 되도록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여송은 크게 노하여 요동 통제사를 군법으로 다스리려 했다.
요동 통제사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첫째는 시랑 벼슬이고 둘째는 서길사였으며, 막내 아들은 신묘한 승려였다.
황제가 그 셋째 아들을 스승으로 모셔 대궐 안에 별관을 세워 그 곳에서 거하게 했다.
그 융숭함이 마치 당나라 숙종이 이필을 대하는 것 같았다.
요동 통제사가 군법으로 처벌당할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들은 세 아들들은 모두 요동까지 달려와 아버지를 구할 방법을 의논했다.
그 때 셋째 아들이 말했다.
[형님들, 제가 소문을 들어보니 조선의 김씨 성을 가진 역관이 제독에게 총애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역관이 말하는 것은 무조건 들어준다고 하니 그 역관을 만나 간곡하게 빌어봅시다.]
그리하여 세 아들은 함께 제독의 병영으로 가서 김역관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김역관은 그 사실을 이여송에게 아뢰었다.
[요동 통제사의 세 아들이 소인을 만나고 싶다고 하는데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이여송이 말했다.
[분명 자기 아버지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빌려는 것일게다. 하지만 저 셋은 명나라에서 벼슬 자리에 오른 귀한 이들이니, 외국의 하찮은 일개 역관인 네가 안 나갈 수는 없지 않느냐? 어서 나가 보거라.]
김역관이 나가자 세 아들은 한 목소리로 간청했다.
[아버님이 변을 당하셔서 이대로는 살아날 방법이 없습니다. 부디 그대가 우리를 위해 제독에게 잘 아뢰어서 목숨이나마 살려주시면 평생의 은혜로 삼겠습니다.]
김역관이 말했다.
[보잘 것 없는 외국인인 제가 어떻게 군법을 마음대로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세 분의 정성이 이렇게 간곡하니 제가 거절할 방법이 없습니다. 제독께 여쭈어 볼테니 여기서 제독의 결정을 기다리십시오.]
김역관이 바로 막사로 들어가니 제독이 물었다.
[저들이 찾아온 이유가 요동 통제사 때문이더냐?]
[그렇습니다.]
이어서 김역관은 세 아들과 주고 받은 이야기를 상세하게 이야기 했다.
제독은 한참 동안 깊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평생 전쟁터를 돌아다니면서 지금까지 사사로운 정 때문에 공적인 일을 그르친 적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 보잘 것 없는 네가 귀인들에게 부탁을 받다니, 네가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알겠구나. 내가 너를 이 명나라 땅으로 데리고 온 후 너를 위해 해 준 것이 없으니, 군법이 지엄하다지만 이번 한 번만은 내가 너를 위해 한 번 도와주마.]
김역관이 밖으로 나가 세 아들에게 제독이 한 말을 전하니, 세 사람은 함께 절을 하며 말했다.
[그대의 은혜 덕분에 아버님의 목숨을 구하게 되었소. 은혜가 하늘과 같이 크고 바다와 같이 넓습니다. 어떤 것으로 보답하면 되겠습니까? 깃털, 사아, 가죽, 금, 은, 옥, 비단 등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어떤 것이든 모두 주리다.]
[저희 집안은 원래 청렴하고 검소합니다. 보배로운 패물이나 진귀한 노리개 같은 것은 제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세 아들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조선 사람이니, 우리 임금님께 청해 그대를 조선의 재상으로 삼게 하면 어떻겠소?]
[우리나라는 명분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저는 중인이니 제가 정승이 되어봐야 사람들은 '중인 정승' 이라고 손가락질하며 놀려댈 것입니다. 차라리 정승이 되지 않는 것보다 못할 것입니다.]
세 아들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를 명나라에서 높은 관직에 임명하여, 유명한 가문의 양자로 들이면 어떻겠소?]
[저희 부모님은 아직 모두 살아계십니다. 지금 조선을 떠나 있는 것만으로도 보고 싶어 속히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세 아들이 말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은혜는 꼭 갚아야겠소. 그대는 원하는 바를 말하시오. 만약 지극히 귀한 물건이어서 들어주기 힘든 것이라 해도 반드시 들어주겠소.]
세 아들이 너무나 애걸하니, 김역관이 엉겁결에 경솔히 말하고 말았다.
[제가 딱히 원하는 것은 없습니다만, 소원이라면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보는 것입니다.]
세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서로 바라보며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셋째 아들인 신승이 입을 열었다.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 아들은 김역관에게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김역관은 안으로 들어가 제독을 만났다.
제독이 물었다.
[그 세 사람이 반드시 너에게 은혜를 갚으려 할텐데, 너는 무엇을 달라고 했느냐?]
김역관이 말했다.
[저는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제독은 번쩍 일어나 김역관의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네가 소국의 사람인데 어찌하여 말하는 것은 그리도 원대하느냐? 그들이 허락했느냐?]
[허락하였습니다.]
제독이 말했다.
[그들이 어디서 그런 여자를 구해올꼬? 황제 폐하라 하더라도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는 찾기 힘들 것인데!]
김역관이 이여송을 따라 명나라 수도 북경에 들어섰다.
그러자 세 아들이 와서 김역관을 데리고 어느 집으로 들어섰다.
그 곳은 세로 지은 큰 누각이었는데, 크기가 크고 시원했으며, 금색의 벽은 휘황찬란했다.
집에 들어가 차를 마시며 세 아들이 말했다.
[돌아가지 말고 오늘 밤은 이 곳에서 자고 가도록 하시오.]
조금 있으니 온 집안에 향 냄새가 가득했다.
안쪽 문이 열리더니 곱고 짙게 화장한 미인 수십 명이 나왔다.
어떤 이는 향로를 들고, 어떤 이는 붉은 보자기로 싼 상자를 들고 줄을 서서 마루 앞에 섰다.
김역관이 그들을 보니 모두 아름답지 않은 여자가 없었다.
미인들을 본 뒤 김역관이 떠나려 하니, 세 아들이 물었다.
[어찌하여 가려는 것이오?]
[제가 이미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들을 보았으니 더 이상 이 곳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자 세 아들은 웃으며 말했다.
[이들은 고작 시녀일 뿐이오. 어찌 천하에서 가장 아름답다 할 수 있겠소?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는 이제 나올 것이오.]
잠시 뒤 안쪽 문이 활짝 열리며 난초와 사향 향기가 진하게 퍼져 나왔다.
그리고 시녀 십여명이 천하일색의 여인을 데리고 나와 마루 위에 올라 앉으니 마치 의자 위에 곱게 화장한 열 손가락이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세 아들과 김역관 역시 차례로 의자 위에 앉았다.
세 아들이 김역관에게 물었다.
[이 여자야말로 진정 김역관이 보기 원했던 천하 제일의 미녀입니다. 어떻습니까?]
김역관이 그 여자를 보니, 온 몸에 장식된 구슬과 보석들에서 비추는 빛 때문에 정작 사람은 보이지가 않았다.
세 아들이 말했다.
[오늘 밤에 그대는 반드시 이 여자와 잠자리를 가져야 합니다.]
김역관이 말했다.
[저는 그저 한 번 보기를 원했을 뿐입니다.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세 아들이 말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대가 천하일색을 보고 싶다고 해서 우리는 발이 닳도록 여자를 찾아 헤멨소. 천하에서 두번째, 세번째 아름다운 여자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가장 아름다운 여자는 황제 폐하의 힘을 빌려도 찾기가 너무나 어려웠소. 그런데 예전에 우리가 베트남 왕의 원수를 갚아준 적이 있었소. 베트남 왕이 우리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우리가 말만 하면 뭐든 들어줄 기세였는데, 마침 그 베트남 왕의 딸이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지 뭐요? 그래서 우리는 당신이 소원을 말한 그 날 바로 베트남 왕에게 사람을 보내 부탁했더니 왕이 흔쾌히 허락했소. 그대가 북경에 들어서는 날에 맞춰 이 여자를 데려오기 위해 천리마 세 필을 썼으니, 그 돈만 수만 은이 넘었소. 베트남과 북경이 삼만리가 넘는 먼 길이었기 때문이오. 오늘 서로 만났는데 그대는 남자가 저 사람은 여자이오. 만약 한 번 보기만 하고 헤어질 것이었다면 어찌 국왕의 딸이 함부로 움직이겠소? 사람은 이치를 따라야 하오. 다시는 사양하지 마시오. 오늘은 길일이니 혼례를 치루기도 딱 좋지 않소?]
김역관은 어쩔 수 없이 그 곳에서 묵기로 하고, 여자와 결혼했다.
마침내 침실에 들었는데, 밀랍으로 만든 촛불이 휘황찬란하고 사향 냄새가 풍겼다.
김역관은 눈빛이 몽롱해지고 심신이 황홀해져 미녀를 바라봐도 놀라고 당황하기만 할 뿐, 남자가 여자를 덮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니 방 안은 고요할 뿐이었다.
세 아들이 문 밖에서 엿보다가 김역관이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을 보고 그를 불러내 말했다.
[남녀가 한 잠자리에 드는데 어찌 이렇게 조용합니까? 아무래도 당신은 제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구려.]
그리고 접시를 김역관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것을 먹어보시오. 이것은 촉땅에서 가져온 홍삼이오.]
김역관이 홍삼을 먹고 방에 들어가니, 눈이 밝아지고 정신이 상쾌해져서 그 미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마치 꽃 같은 얼굴에 달 같은 자태로, 실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은 잠자리를 같이 했다.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니 세 아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김역관을 보고 물었다.
[저 미인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외국인이 졸지에 엄청난 은혜를 입었지만, 앞으로의 일은 어떻게 해야할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세 아들이 말했다.
[그대가 우연히 기이한 만남으로 인해 이 천하일색을 얻었는데, 사람이 한 번 만나면 헤어지는 일은 마음대로 해서는 아니됩니다. 그대는 외국인이라 여자를 데리고 가는 것도 어려울 것이고, 가족들을 본국에 두고 이 곳에 사는 것도 힘들 것이오. 하지만 우리 세 사람이 이미 그대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그대의 일을 소홀히 하겠소? 그대가 역관의 임무를 맡았으니, 매년 사신들이 명을 찾을 때마다 반드시 수행 역관으로 따라 오시오. 그렇게 일년에 한 번씩 마치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것처럼 하면 좋은 일이 아니겠소? 우리가 이 곳에서 모든 것을 도와주리다.]
김역관은 그 후 평생 역관으로 매년 한 번씩 명나라로 들어가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곤 했다.
마침내 그녀와 김역관 사이에는 몇 명의 아들이 생겼는데, 김역관의 후예들은 중국에서 부귀공명을 누리며 살았다고 한다.











